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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콘솔/1980

패밀리컴퓨터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Family Computer 현대 컴보이 | 1983]

by VGameLine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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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L HVC-001
CPU 리코 2A03 1.79 MHz
SOUND CPU 내장 PAPU(Pseudo Audio Processing Unit)
PPU  리코 2C02 5.37 MHz
출시일 일본:1983년 07월 15일 | 북미: 1985년 10월 18일 | 유럽:1986년 09월 01일 | 한국: 1989년 09월

 

패밀리 컴퓨터(Family Computer)는 닌텐도로부터 1983년 7월 15일 에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이다.일본내에서의 약칭은 패미콤(Famicom), FC. 당시의 발매 가격은 14,800엔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를 국내외에 출시해 40억엔의 이익을 내고 사업을 성공시킨 닌텐도가 그 이익을 투입해 개발했다. 동시대에 발매된 게임기 중에서 최다 출하 대수를 기록해, 일본에 있어서 가정용 게임기 및 게임 소프트를 판매하는 가게를 「패미컴샵」이라고 호칭하는 등 상표의 보통 명칭화가 될 정도로 일반에 인지되어 출판이나 음악등의 다른 업종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 밖에서는 중화민국(대만), 홍콩에서도 일부를 현지 사양에 맞춘 후 발매되었다. 한편 북미의 미합중국 및 캐나다, 유럽의 EC 가맹국(당시), 오스트레일리아, 한국등 주요부분의 사양이 동일한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약칭: NES)으로 발매되었다.

2003년에 본체 출하는 완료했지만, 일부의 게임 소프트는 후계 게임기에서 복각되고 있다.

 


 

 

닌텐도 패밀리컴퓨터 1983 TV 광고

 

 

당시 아케이드 게임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동키콩에 뒤떨어지지 않고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성능을 목표로 설정하면서 개발은 1981년 10월 또는 11월경부터 당시 업무용 게임 사업의 축소로 인해 손이 비어 있던 개발 제2부(우에무라 마사유키 등 아케이드 게임 개발진)가 실시했다. 개발 개시의 직전에 코레코사가 코레코 비전의 시제품을 닌텐도에 반입하고 있어 그 성능에 개발 제2부의 기술자들은 놀람과 동시에, 향후 개발해야 할 제품의 이미지로서 코레코비전을 설정했다.

 

개발 코드 네임은 처음에는 「텔레비전 게임」, 그 후 「영 컴퓨터」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패밀리 컴퓨터」의 이름은 우에무라의 아내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우에무라 본인은 그것을 부정하고 실제로는 스스로 명명하였으며, 아내는 약칭인 「패미컴」을 지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닌텐도의 판매 전략·설계 사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요목이 있었다.

저가 설정
간편하게 살 수 있는 가격 설정을 해, 부모가 아이에게 사주기 쉽도록 한다.

 

소프트의 중시
다채로운 소프트를 점점 발매해, 항상 새로운 놀이를 제공한다.

 

디자이너의 중시
컴퓨터 전문가가 아닌 디자이너도 개발 지원 도구를 사용해야 게임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게임에서 놀고 있는 본인 외에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즐길 수 있는 영상 표현을 제공한다.

 

간단한 조작성
십자형 키와 두 개의 버튼만으로 화면을 보면서 쉽게 캐릭터를 조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디자이너의 자유로운 발상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플레이어·오디언스 모두 만족시키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게임에 불필요한 부분은 배제되어, 게임 전용기로 좁힘으로써, 범용기와 비교해 고성능화를 실현했다.

 


 


1980년대 전반은 아직 가정용 게임기 보급률이 낮아 범용 IC칩을 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결과적으로 화면 해상도는 낮고(100×100 정도), 색수도 몇 색 정도로, 화면 스크롤의 실현도 어려운 게임기가 많았다. PC로 해도 아직 여명기에 있어, 고가인 것에 비해 CPU나 메모리의 제약이 엄격해, 그래픽이나 사운드에 이르러서는 최저한의 사양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로 아케이드로 가동되고 있는 게임을 손색없이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시 인기가 있었던 '동키콩'의 아케이드 기판을 참고해 게임용으로 사양을 최적화한 각종 커스텀 IC를 개발했다.야마우치는 타사가 흉내를 내는 데 1년간 혹은 3년간은 걸리는 성능을 요구했다.

커스텀 IC는 리코제의 것을 사용했다.리코가 선택된 것은 이하의 배경이 있었다.

미츠비시 전기로 닌텐도와 「컬러 TV 게임 15」의 후의 게임기용 LSI의 개발에 종사하고 있던 야기 히로미츠가 리코로 이적해, 1980년(쇼와 55년)에 반도체 사업에 참가하고 있어 닌텐도와 인연이 있었다.
리코는 1981년(쇼와 56년) 4월에 75억엔을 들여, 오사카부 이케다시에 커스텀 IC 전용 공장을 완성시켰지만, 실적 부족으로부터 고객을 획득하지 못하고 곤경에 처했다.


리코는 당시 기계식 복사기를 전자화할 것을 예측하고 최신의 반도체 설비와 기술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전자화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부터, 새로운 반도체 설계를 해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당시는 미국을 중심으로 PC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시대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일본의 메이커는 「DRAM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던 주기억 소자의 고속화·대용량화의 기술 경쟁에 말려들었지만, 리코는 반도체 전업 메이커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닌텐도는 당초 커스텀 칩의 베이스 CPU에 아케이드 게임으로 익숙해져 있던 Z80을 희망했지만, 리코는 자사가 록웰로부터 라이센스 취득의 전망이 서 있던 6502를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다. 리코는 「Z80의 라이센스 교섭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개발 기간이 장기화할 우려가 있다」 「6502를 사용하면 칩 면적이 Z80의 1/4이 되어 코스트면에서 유리한 것 외에 일본 국내에서 6502는 별로 보급되어 있지 않아 타사에 따라 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6502를 추천해, 닌텐도에서도 검증의 결과 「면적을 취하는 Z80보다도,음원 전자 회로와 6502를 하나의 LSI에 넣어 커스텀화한 LSI를 채용하는 것으로 저비용화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신설계의 화상 표시용 프로세서와의 궁합이 좋다」때문에 6502를 채용하게 되었다.

커스텀 칩의 사양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미야모토 시게루등의 게임 디자이너의 요망을 도입했다.당초 우에무라등이 설계한 칩에서는 최종적인 본체 가격이 고액이 되어 버리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제조비 저감책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색수의 삭감이나 음원의 성능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지만, 최종적인 색의 사양 등은 미야모토가 결정했다.

덧붙여 닌텐도가 리코에게 「2년에 300만대 보증한다」라고 약속한 것 때문에 커스텀 LSI의 가격을 억제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야마우치는 이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다. 또 닌텐도의 「2,000엔에 팔아 달라」라는 요구에 대해, 리코가 「100만대의 생산을 보증한다면 가능하지만, 그 이하라면 불가능하다」라고 회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코스트 요인도 있어, CPU의 속도나 메모리의 용량은 억제되었기 때문에 범용성은 낮았지만, 게임의 표현력에 필요하고, 코스트 부담이 비교적 적은 요소를 탑재한 주변회로의 기능에 의해 범용 파츠에 의해 구성된 하드웨어와 비교하여 표현력을 향상시키는데 성공하였다.이렇게 그래픽 면에 특화되어 설계됨으로써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등은 1980년대 초반의 아케이드 게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그래픽을 높은 프레임 레이트로 그릴 수 있었다.

비프음이나 노이즈음만 탑재해 멜로디조차 제대로 연주할 수 없는 가정용 게임기가 보통일 당시 PSG 준거 음원과 PCM 음원을 탑재한 것도 혁신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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